카메라는 절대로 뒤를 보지 못한다. 오로지 전면(前面)만을 향해 사실을 고착하고, 떼어내며 혹은 감추기도 한다. 그러한 사진의 마술적인 힘은 한편으로는 커다란 경이로움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계이기도 하다. 사진이 보여주는 전면은 그래서 정면(正面)이기도 하다. 정면으로 사물을 직시하는 사진의 힘은 본질에 가까운 무엇을 내포한다. 여전히 감출 수 있는 여지는 있으나, 사진에 드러난 부분의 사실로도 우리는 충분히 전체를 예상하기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 사진은 하나의 틀에서 모든 것을 드러내지 않는다. 떼어내는 작업이라고 여러 사람들이 공감하는 이유이기도 한데, 전면의 다각화는 그래서 전체를 예감하는 일이기도 하다. 여러 작은 조각들을 모아 전체를 예상토록 앞과 뒤를 선별하고 모둠을 만들어 상상과 예상이 닿을 수 있는 충분한 거리에 필요한 다리를 놓는 작업은 그래서 하나의 지휘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진가의 경향이 이지점에서 나뉜다. 보여 주고자 하는 대상의 전체가 한 화면에서 결정 나는 경우와 긴 호흡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그것이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김춘식의 작업은 후자의 사진 제작 방식에 매우 충실하다. 실험적인 방식으로 사진을 만들어가면서 때로는 주어진 상황과 대상이 가진 역사와 현실의 단면 모음에 집착을 한다. 그의 작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다소 형식적인 분류방식이 될지 모르지만, 스트레이트한 작업과 (필름작업이며, 촬영과 프린트 모두), 만드는 작업(디지털작업, 촬영과 프린트 모두)이 그것이다. 전자의 작업은 매우 전통적인 방식이며, 후자의 방식은 다시 둘로 나뉘면서, 네가티브 사진과 포지티브사진을 병치시켜 보여주는 작업과 아예 포토샵에서 대상을 떼어내 두 사진을 한 화면에 포개 얹는 작업이다. 어떤 의미로 생각해 봐도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작업들의 모둠은 그래서 찬찬히 작가의 생각을 더듬어 보아야 할 근거를 제시한다. 왜 그랬을까?

 

어쩌면/참으로, 고희를 넘긴 나이에 귀가 순해지면서 모든 사물로부터 각진 부분을 스스로 떼어내는 이 시기에, 그는 다시금 사각형의 ‘디지털 경이’에 몰두해 두 개의 대립되는 이미지를 아래위로 함께 보여주기도 하고, 또 사각의 사진 안에 다시 사각의 이미지를 덧씌우기도 한다. 물론 컬러와 흑백을 섞어가면서 스트레이트한 포트레이트를 보여주기도 하면서 말이다. 사실 이러한 제작 방식은 젊은 작가들에게서 흔희 볼 수 있다. 그들의 실험적인 생각들이 다소 치기어리다 손가락질 받더라도 감행하는 큰 이유는 ‘결과의 충돌성’에 있다. 두 개 혹은 그이상의 이미지가 병치되어 보일 때 이를 한 눈으로 보게 되면 보통은 시각적인 혼란을 겪게 된다. 작업 생산자의 의중을 알아야만 하기에 의구어린 눈으로 보아야하는 이유이기도하고, 또 때로는 그 대립되는 이미지의 충돌로 혼란스럽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작가 김춘식은 이러한 시도를 감행하기에는 녹녹치 않는 세월을 살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 방식을 사용하는 이유는 어쩌면 자신에게 부과되는 시간에 대한 짐과 역시나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현실에 대한 작은 저항이 아닌가 싶다. 그의 이력이 말해주듯이, 그는 오랫동안 전주라는 곳을 기반으로 사진을 해왔다. 서울(중앙)과 대척점에 있는 전주(지역)의 의미는 누구도 쉽게 예단 할 수 없을 것이다. 사진 혹은 예술의 질(質)이 주거 공간의 크기와 전혀 비례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우리는 내가 어디에 사느냐가 어떤 질의 작업을 하느냐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것처럼 인식한다. 서울작가와 지역작가라는 이분법적 판단이 그것이며, ‘서울서 하는 전시’와 전주에서 하는 전시‘가 구분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공간 차이의 부촉점(不觸点)을 느끼면서, 여전히 ‘이곳’에서 작업하는 그는 이러한 상황의 무게를 저항으로 뚫고 나가고자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의 사진이 언뜻 이해하기 힘들어 보이는 것도, 그가 새로운 형식에 문을 열고 자신의 미궁(迷宮)을 스스로 열어 보이는 이유도 바로 이지점에서 이해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다시, 그의 작업의 중심은 그래서 촌농(村農)이 중심이다. 그가 농촌별곡이라 제목을 달고 작업한 사진들은 그래서 모두가 다 자신이며, 항변하는 자신인 것이다. 그의 가슴에 박힌 저 구름도 그의 머리를 배회하는 구름도 그리고 저 철조망 위로 보이는 하늘에 다시 드리워진 구름도, 구름의 정체가 그런 것처럼 정처(定處)가 없으나, 거처(居處)는 있는 것이다. 그것이 그를 사진으로 내몰면서 존재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저항의 뜻을 전하게 하는 것이라 보인다. 물론, 우리가 사진을 통해 그의 모든 면을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그의 작업에서 풍기는 저 실험의 냄새가 정녕 그가 긴 시간을 암실에서 그리고 모니터 앞에서 끙끙 거리며 만들어 낸 것이라면 그것이 그의 본질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다시, 그의 작업에 들어있는 또 하나의 중심은 번복(飜覆)이다. 포지티브(positiv)한 이미지로 세상을 보는 우리는 정작 그 이미지가 대상이 아님을 모른다. 사실, 인간은 세상을 볼 수가 없다. 오직 빛의 매개를 통해서만 눈에 맺힌 상을 감지할 따름이다. 그러니까 ‘본’다라고 하는 것은 능동형이 아니라 수동형인 것이다. 하지만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망막에 맺힌 ‘도립(倒立) 축소된 상’을 어떻게 하여 다시금 상의 아래, 위를 바꾸고 마치 촉지(觸肢)될 것과 같은 느낌으로 ‘보’게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일 터이다. 그것은 망막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망막 뒤에 붙어있는 시신경을 타고 머리의 중앙에 있는 전두엽과 후두엽 사이에 마치 프로젝터로 상을 비추듯이 띄움으로 해서 뇌가 인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 몸의 생물학적 반응처럼, 김춘식의 포지티브는 네가티브와 병치/배치되면서 자신의 생각이 다시 한 번 공고해진다. 결국 그가 본 것이 현실 대상이 아니라, 대상으로부터 반사된 빛의 덩어리라는 사실을 사진적으로 감지하고 나면, 바로 네가티브(negativ)가 되는 것이다. 적어도 전통적인 사진 생산방식으로 보자면 말이다. 그리고 이는 다시 그의 현실에 대한 이해태도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포지티브한 사실을 번복하여 네가티브한 것과 병치시키는 전략은 그래서 매우 반역(反逆)적이기도 하다. 그는 현실의 이미지가 있는 그대로 감지되기보다는 이처럼 한 번의 번복을 통해 본질은 그대로 둔 채 전혀 다른 대척(對蹠)의 모습으로 함께 보이는 것을 강조한다. 김춘식의 이러한 현실이미지에 대한 반역이 설득력을 갖는 것은 농촌의 현실을 몸으로 그리고 카메라로 경험한 사람은 안다. 그 농촌에서 촌농들과 함께하며 얻는 ‘세상에 대한 반역적 인식’은 바로 이번 김춘식의 작업에 또 하나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김춘식 사진의 힘이다.

 

 

On the <Farm Village Special Song> by Kim Chun-sik

Jung Ju-ha(Photographer, Pref. in Department of Photograph of Baekje Art College)

 

Camera doesn't see absolutely backward. Only, does it adhere to, separate or hide the fact only toward a face-surface. Such a magical power of photo is a big wonder on the one hand and its limit on the other hand. The face-surface to show through photo can call it a right surface. The power of photo to make the thing see in the right surface is including in what reaches to the essence. There is a margin to hide but this is just the leisure we can forecast enough the whole even as a fact in part to expose in the photo. Also, the photo doesn't all the things in a frame. It is why people sympathize to be called it the work to separate yet the diversification of face-surface calls as the work to forebode the whole. The work to bridge necessary to the enough distance after choosing the front and back to forecast the whole due to collecting various little pieces and making a group can call a command. And the tendency of photographer is divided in this point. Those are a case to decide the whole of an object to show in a picture and a case to link in a long breath.

 

The work by Kim Chun-sik which we look at follows the latter photo manufacturing method to the full. He sometimes abides by collecting the history and present conditions of given situation and object as making a photo in the experimental method. His work divides largely into two. Although it is said that it is more or less a formal classification method, those are a straight work(both shot and print, as film work) and a artful work(both shot and print, as film work). The former is the very conventional method and the latter again divides into two, a work to show as juxtaposing negative photo and positive photo and a work to overlap two photos in a picture after separating wholly the object from photoshop. A group of these works not to show to be matched well with at all even in any meaning present its reason only in the case of thinking slowly of writer's thought. Why?

 

Maybe/in truth, as his ears are gentle in the age over seventy old and separating a angle parts after all the things, he may show the two contrary images toward under and upper being devoted to 'digital wonder' of quadrangle and overlap again the image in quadrangle on the photo in quadrangle. Of course, he may show a straight spotlight as mixing color with black-white. In fact, this manufacturing method can see commonly in the young writers. A big reason why they try in spite of bringing a contempt as a childish(?) upon them is 'a collision of result'. If we can see it in the eyes in case two or more images show to be juxtaposed, we suffer commonly visual disorder. This is why we must see in the doubtful eyes because of knowing the work producer's intention and why it is disorder because of sometimes colliding the contrary images. Yet, writer Kim Chun-sik has lived a hard time to suffer such a try. In spite of that, the reason to use this method may be a little resistance against a charge on the time distributed to himself and a present condition surrounding history and self. As his career is spoken, he has made a photo on the base of the place called Jeonju for a long time. A meaning of Jeonju(local) on the antipode of Seoul(center) won't be decided easily in advance by anyone. Although the quality of photo or art is not in proportion to the size of living space, present we recognize as if where I live has a close relationship with how I do a good work. As does binary judgement between writer in Seoul and writer in Jeonju, so does the division between 'an exhibition to do in Seoul' and 'an exhibition to do in Jeonju'. As feeling the non-contact point of space difference, he who works still in 'this place' tries to go forward through the resistance of heavy. The reason to make his photo difficult to understand seemly and to open his labyrinth of itself as he opens a new pattern is also likely to be understood in this point.

 

One, his work focuses on the village farmer. The photos to work as a theme of <farm village special song> is the self in all and the self to protest. As a cloud fixing in his bosom, wandering upper the head and floating on the sky to show beyond that wire fence, he like an identity of the cloud has not a place to fix but to live. That makes us deliver a meaning of the resistance rising from existential deep place due to pursuing him into the photo. Of course, we cannot know all of him through photo. But, If such a fresh taste to spread from his work is to make hardly in the darkroom and before the monitor for a long time, it is his essence, isn't it?

Once more, another focus in his work is on reversal. We to see the world as a positive image don't know that the image isn't an object. In fact, human cannot see the world. He is only to feel the image to reflect in the eyes only through the media of a light. So, to 'see' is not an active pattern but a passive one. Yet, to be a problem in truth is how we change 'a image reduced in the handstanding' to reflect on the retina into the under and upper of image and make in the feeling to be finger-knowing 'see'. That is not made in the retina but recognized by the brain as floating as if reflecting the image through projector on between the frontal lobe and laryngitis in the center of head along with the optic nerve adding to behind the retina. Like a biological response with our body, positive of Kim Chun-sik get his thought confirmed again as juxtaposing/contradicting with negative. Finally, when we sense photographically the fact to not be a present object but a mass of light reflected from the object to be seen by him, it is just negative. It at least is true in the conventional photo production method. And this has a close relationship with the attitude to understand on present condition. The strategy to juxtapose with negative as upsetting positive fact is very treacherous. He strengthens to see together in the wholly different antipode figure in the conditions of remaining the essence in itself through one reversal like this without sensing a present image in itself. To have the persuasive as a treason against present image by Kim Chun-sik experiences the present of farm village by the body and camera. 'The treacherous recognition against the world' to gain as living with village farmers in farm village is another root in the work by Kim Chun-sik. And that is just the power of photo by Kim Chun-si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