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의 아마추어 사진가 김 춘식 선생이 두 번째의 전시와 함께 사진집을 낸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마추어’라면 초보자란 뜻으로 흔히들 쓰는 것 같다. 그러나, ‘아마추어’란 초보자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우리가 다 알고 있듯, 프로페셔널, 즉 전문적인 사진가에 대하여 다른 직업에 종사하면서 사진을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이들 중에는 소위 프로 못지 않은 실력과 이론으로 사진을 하는 분들도 적지 않은데, 김 춘식 선생도 이러한 분들 중의 한 분이다.


필자는 늘 아마추어의 ‘특권’을 강조한다. 아마추어들에게는 프로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또는 프로들이 가질 수 없는 ‘특권’이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자유’이다. 누가 뭐라고 하든 자기하고 싶은 대로, 제 생각이 미치는 대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인 것이다. 프로들이 자유롭지 못한 것은 우선 ‘먹고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필 먹고사는 일이 아니라도 프로로서의 자존심이 그들 스스로를 묶기도 한다.

그뿐 아니라, 프로들은 이 나라 사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 이 나라뿐이 아니라 사진 전반에 대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으로, 사진이 어떠해야 하고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확고한 생각과 책임을 지고 가야 하는 사람들이 프로인 것이다. 그리고, 프로란 모든 분야를 망라해서의 말로, 따라서, 인상 사진을 하는 사람은 인상 사진에 대한 신념과 방향을, 사진 기자는 사진 기자로서의 자각을 확실히 가지고 있어야 진정한 의미에서의 프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추어는 이런 모든 것에 묶이지 않는다. 그럴 수도 있지만, 그럴 필요도 없다. 왜냐 하면, 그들의 직업은 따로 있고, 그들은 그들의 직업에 더 충실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사진의 고민은 사진 전문가에게 맡기고 그들은 그들의 전공 분야에 대해 고민하고 연구하고 발전시켜야 하는 사람들로, 사진에 관한 한 완전한 자유인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함부로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뜻은 또한 아니다. 사진만을 전문적으로 생각하고 고민하지 않는다는 뜻일 뿐, 진지한 ‘작가’라면 그것이 ‘아마’든 ‘프로’든 작가적 입장에서 사진을 생각하고, 연구와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아마추어라 해도 사실상 프로들과 그 작업에서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진지한 아마추어 작가들은 때로 프로들을 놀라게 하고 부끄럽게도 해 준다. 작품의 질이나, 결과나, 또는 돈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작업하기 때문으로, 모든 것에서 자유로울 때 작업은 좋아진다. 무엇엔가, 하다 못해 잘 찍어야겠다는 강박관념 하나에만 묶여도 좋은 결과를 얻기 어려운 것이 작품이라는 것을, 겪어 본 사람들은 다 안다.


김 춘식은 자기 사진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고 고민을 즐기는 사람이다. 내가 그를 알게 된 지도 한 20년 되는 것 같다. 특히 그와는 동갑내기라 친한 친구로 지내면서, 만나면 다른 얘기는 거의 없이 사진 얘기로 시종하다시피 했다. 이는 내 뜻이 아니라 오로지 그의 열의로 해서였다.

지난 번 보여 준 작품 ‘나그네’도 일반 아마추어 작가들과는 달랐음을 기억한다. ‘나그네’는 사람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 그것도 남도 사람들, 그 중에서도 별로 가진 것 없이 소박하게 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보통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었다. 그것이 큰 관심(?)을 끌지 못했던 것은 ‘아름다운 사진’이 아니었던 탓일 것이다. 아름답기는커녕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을, 또 앵글이나 기법 등에서의 아무런 재주도 부리지 않고 정직하게 접근하다 보니 일반인들의 눈을 끌지 못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김 춘식의 작가 정신이 여기에서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아마추어 작가들은 아름다운 풍경에 끌린다. 예술 작품은 아름다운 어떤 것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탓이다. 그러나, 예술은, 진정한 작품은 아름답고, 않고에 관계가 없다. 얼마나 진실한가, 얼마나 절실한가가 작품의 질을 결정지어 준다. 또한, 자신 없는 작가들(아마건 프로건)은 영합한다. 자기를 버리고 남의 눈, 남의 입을 의식해서 눈치껏 작업을 한다. 자신이 있는 작가만이 남을 의식하지 않는다. 성공은 이런 사람들의 몫이 된다.

이번 ‘농민 2002’도 같은 맥락에 선다. 다만, 전과 달리 이번에는 같은 사진을 두 벌 구워, 한 벌은 정상적인 인화로, 또 한 벌은 매우 어둡게 인화를 해서 둘을 함께 펼쳐 보이고 있다. 이번에는 말하자면 ‘기법’을 써 본 것인데, 이것은 사실상 ‘기법을 위한 기법’이라기보다는 자기 생각을 나타내기 위해 ‘불가피한 접근 방법’이었다 함이 적절할 것이다. 말하자면, 주제 의식을 추구할 때에 피해 갈 수 없는 표현 방법이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이런 접근 방법에 대해 필자는 완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재고해 볼 것을 권하기도 했다. 그러나, 작가 김 춘식의 신념은 확고했다. 그대가 말하지 않았는가, ‘아마추어 작가는 자유롭다’고. 그 자유를 이제 누리는 것이라고. 성공 여부는 그 후의 문제라고. 필자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무슨 기법을 쓰든, 어떠한 접근 방법을 택하든 그것은 작가의 자유이다. 더욱이 그것이 아마추어 작가임에랴. 이러한 아마추어 작가의 특권을 놓고 내가 왈가왈부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한 가지 생각이 났다. 필자는 바둑을 즐기지만, 아직까지 승패에 크게 연연해 본 적이 없다. 누가 상대방을 훈수해도 화를 낸 적이 거의 없다. 내가 잘못 두었을 때에도 절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물리지 않는다. 그저 있는 능력을 다 짜내어 열심히만 둔다. 왜냐 하면, 전문 기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창호나 조 훈현 같은 전문 기사에게는 한 판, 한 판이 살얼음판일 것이다. 승패에 초연할 수가 없을 것이다. 수입도 수입이지만, 전문 기사로서의 명예와 자존심이 걸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나와 관계없는 일, 바둑에서만큼은 나는 완전한 자유인인 것이다. 그리하여, 바둑을 둘 때면 늘 즐겁기만 하다. 지든 이기든.

 결국, 이것이다. 그는 사진을 즐기고 누리기만 하면 된다. 그에게 책임을 물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성공 실패는 그 다음의 문제인 것이다. 온갖 실험을 마음 내키는 대로 할 기회가 그에게 부여되어 있는 것이다. 내가 바둑에서 온갖 기발한 ‘묘수’를 짜내듯. 대신,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실패할 확률도 퍽 높다. 그러나 신념을 가지고 진지하게 한 실험이라면 비록 실패를 한다 해도 그것은 성공이다. 이것이 아마추어 작가의 특권인 것이다.


이번 ‘농민 2002’는 사실상 ‘김 춘식 2002’라 해야 옳을지도 모른다.

지난번의 ‘나그네’에서 주인공들은 비록 김 춘식이 찍기는 했지만, 그들은 그들의 의식으로 등장해서 그들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의 주인공들은 가엽게도 김 춘식에게 잡힌 포로들일 뿐이다. 자기 모습으로 자기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김 춘식의 의식에 걸려 자기를 잃고, 때로는 죽음의 모습으로. 때로는 상실의 영상으로 음울한 빛을 발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들 사진은 대체로 그 어두웠던 I.M.F. 이후의 농민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라고 했다. 웃음기 있는 농민이 한 사람도 없는 것이 그 탓이라 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들은 I.M.F.가 아니라 김 춘식의 포로로 잡힌 때문에 웃음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모두가 죽음의 너울을 쓰고 있으니 즐거울 리가 없을 것이다.

  김 춘식은 다시 한번 작가로서의 자기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 대상은 대상이 아니라, 작가의 소재일 뿐이다. 주제를 통해 작가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가에 따라 대상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바뀐다. ‘농민 2002’가 ‘김 춘식 2002’가 될 수밖에 없는 소이연이다. 그리고, 김 춘식이 작가일 수밖에 없는 소이연이기도 하다. (2002.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