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 김춘식

현대예술과 한국사진-재현의 퇴조와 실재의 회귀

주제가 다양하고 작가들마다 편차는 있지만 90년대 이후의 작가들 사이에서 가장 널리 공유되었던 문제의식은 우선 재현의 권위에 대한 불신을 형상화시켜내는 작업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다시 한번 지각의 형태로서의 근대적 시각 일반에 대한 비판과 맞물려 근대적 시각의 완성품처럼 여겨져 온 사진적 시각을 다양한 방식으로 회의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기도 했다. 사진은 19세기의 발명품이기도 하지만 기계적인 방식으로 세계를 관찰하는 카메라 옵스쿠라의 시각은 이미 15세기 무렵에 고안된 것이다. 그래서 리오타르는 사진이 ‘가시적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15세기의 기획을 완성시킨 것’이라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시각의 역사나 시각예술의 역사에서 갑작스럽게 튀어나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낯선 생각이 아니다. 사실 원근법은 그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예컨대 13세기 무렵에도 맹아적인 형태로 발아해 있었고 그것의 발달은 광학의 연구 성과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데카르트의 <굴절광학>은 그것을 나중에 집대성한 것이다. 그 시각이란 단일시점에서 세계를 재구성하는 주체 중심의 시각이자 그 시각에 부동의 인식론적 권위를 부여하는 지식의 도구로서의 시각이다. 하버마스가 옹호하고자 했던 계몽주의라는 기획의 일부도 이 시각에 빚지고 있다. 계몽이 칸트의 표현처럼 미숙한 정신을 성숙한 정신으로 이끌어내는 것이라면 세계에 대한 명철한 인식 수단으로서의 시각이나 권위 있는 주체는 미완의 기획을 완수하는 데에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Edourd Manet, Balcon,1868 - 1번째 사진

한편 현대성 비판에 기초 개념을 제공해주었던 현대 철학자들의 사유는 예술에 관한 논의에도 폭넓게 영향을 미쳐 개념의 확대재생산을 낳는다. 푸코, 데리다, 리오타르를 비롯하여 바르트, 바타이유, 라캉, 보드리야르 등 현대성에 관한 논의와 직접 관련이 없는 이들의 사유 또한 현대 예술의 전개와 암묵적으로 얽혀 들어가는 것이다. 특히 주체와 권력의 문제뿐만 아니라 시각과 재현의 문제에도 부분적으로 천착했던 푸코는 논의의 중심에 있었다. 모더니즘의 시대가 종결되었다는 입장에서 그가 본 모더니즘 예술은 재현의 패러다임, 그의 표현대로라면 재현의 에피스테메에 속해 있었다. 그에 따르면 유사의 패러다임에서 재현의 패러다임으로 전이되는 단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화가가 벨라스케즈이다. 한편 마네는 꽈트로첸토 이후 줄곧 회화가 재현해 왔던, 혹은 재현하려고 애써 왔던 공간의 진실을 화가의 눈으로 폭로해냈다. 전통 회화가 그려왔던 공간은 그 공간을 관찰하기에 가장 이상적인 장소에서 바라본 공간, 요컨대 화가의 위치에서 본 공간이다. 그것은 관객에게도 마찬가지여서 화가의 눈과 관객의 눈은 겹친다. 그렇게 재현된 공간은 회화가 본래 평면 위에 펼쳐져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들고, 결국 자신이 그려낸 공간을 속인다. 혹은 부정하게 만든다. 마네는 바로 자신이 그려낸 공간의 내부에서 이처럼 꽈트로첸토 이후의 전통회화가 은폐해 왔던 회화의 물질적 한계를 혹은 회화의 속성을 드러내는 데에 주의를 쏟았다. 이러한 생각은 그린버그나 프리드와 같은 미술평론가들의 입장과도 유사하지만 어쨌든 그렇게 해서 마네는 재현의 패러다임에 조금씩 균열을 만들어나가는 선구적 예술가가 된다. 마네 이후 이러한 전략을 가장 극명하게 혹은 가장 격렬하게 실천해 옮긴 화가는 칸딘스키, 클레, 그리고 마그리트이다. 재현의 진실이 폭로된 이후의 시각예술은 이제 새롭게 예술의 임무를 찾아 나선다. 그렇다면 꽈트로첸토가 기획했던 시각예술의 마지막 도달점으로 생각되어온 사진은 회화의 자백 앞에서 어떤 운명에 처하게 되는가. 만약 그 고백이 정당하다면 사진은 탄생과 더불어 종말을 선언하거나 그 고백의 불충분함을 입증하기 위해 더욱 치열한 비판의 길을 걸어야 마땅할 것이다. 재현의 논리에 회의적인 작가들은 후자의 길을 걷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마네의 후예이기도 하다. 제프 월(Jeff Wall)을 비롯하여 모더니즘 예술의 재해석에 관심을 두는 많은 작가들이 그러한 경우에 속한다 하겠다.

Jeff Wall, Picture for Women,1979- 2번째 사진

한편 사진이 르네상스 회화의 연장 혹은 마지막 귀결점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그 예술과 사진은 결국 같은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동일한 기획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현대예술과 현대사진이 중첩되는 현상은 그러한 인식이 광범위하게 확장된 결과로 보인다. 그러나 첨예한 논리에 따라 문명 전체를 걸고 벌이는 예술가들의 전쟁은 아방가르드만의 몫이 된다. 사진은 단지 꽈트로첸토의 기획에 따라 세계를 재현해내는 고도로 복잡한 시각적 도구가 아니라 회화보다 몇 백만 배나 신속하고 정확하게 이미지를 생산할 수 있는 간편한 수단인 것이다. 또한 실용주의적 측면에서나 공리주의적 측면에서도 사진은 회화보다 뛰어났다. 나아가 지각의 구조와 방법에 영향을 미칠 만큼 광범위한 유통을 가능케 하는 사진의 복제력은 벤야민의 지적처럼 예술의 기능과 개념에 변화를 초래할 정도로 발전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조건들 속에서 아방가르드 예술가의 고상한 논리가 설 자리는 자꾸만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고도로 성장한 자본주의 사회의 성격을 말해주는 용어는 여럿이어서 한두 가지로 규정하기 어렵지만 그 용어들이 의미하는 바는 한결같이 사회의 성격이 본질적인 변화를 맞았다는 점이다. 조건과 환경의 변화는 비록 더디더라도 차츰 예술의 질서에까지 영향을 미쳐 이제 예술은 모더니즘의 논리와 양립할 수 없을 만큼 크게 바뀌어갔다. 특히 팝의 영향은 네오 팝으로까지 이어져 지배적인 예술의 형태로 자리 잡았다.

Richard Prince,Untitled(Cowboy),1980-84 - 3번째 사진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에 관한 비평은 미국에서 로잘린 크라우스 이후 핼 포스터나 벤자민 부클로 등에 의해 주도되면서 구체성을 띄게 된다. 현대철학자들의 주요 개념들에 의지하면서 그들이 펼쳐놓은 비평은 모더니즘 이후 예술의 흐름에 일관성을 부여하기 위한 몸부림처럼 보인다. 팝이 퍼트린 구체적 이미지, 사물로서의 오브제와 현실 자체로서의 행위, 사진 등은 우선 모더니즘 예술의 추상적 경향으로부터 점차 멀어져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로잘린 크라우스는 이를 두고 기호의 확장, 좀 더 정확히는 퍼스의 개념을 빌려 아이콘으로서의 기호가 아닌 인덱스로서의 기호가 예술의 영역 전반에 퍼져나가는 현상으로 보았다. <지표에 관한 노트>에서 진단한 바에 따르면 지표로서의 기호는 이미 뒤샹에서부터 시작하여 사진으로 확장되어간다는 것이다. 이 시기 예술의 장 속으로 급속히 침투해 들어오는 사진의 확산에 대해 일관성 있는 논리로 진단을 내리기 어려웠던 비평가들은 사진에 관한 미학적 기준을 찾아 단지 적용하는 데에 급급했다. 그러한 예가 퍼스의 지표이론이나 바르트의 푼크툼 개념 같은 것이다. 한편 줄곧 포스트모더니즘의 옹호자로 활약해온 핼 포스터는 이를 실재의 개념이 다시 예술의 주요 화두로 회귀하는 현상으로 진단한다. 워홀의 복제 이미지나 신디 셔먼의 스틸 사진, 리차드 프린스가 차용한 광고 이미지, 하이퍼 리얼리즘 등이 그러한 예이다. 이 때의 실재란 르네상스 이후의 재현예술에서 문제되었던 환영주의보다 더욱 고도로 은폐된 가짜로서의 실재이다. 이 개념 또한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 이론에서 빌려온 것이다. 하지만 실재 개념의 회귀를 보여주는 이러한 예술은 본래의 시뮬라크르와는 달리 오히려 재현예술의 환영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비판적 힘을 보존하고 있는 건강한 예술처럼 간주된다.